사명대사께서는 조선조 중종 39년 10월 17일 경남 밀양군 무안면 고라리에서 태어나셔서 

16세때 황악산 직지사신묵화상에게서 득도하여 18세 되던 명종 16년에 승과에 급제하시고, 

32세에 선종 수사인 봉은사 주지로 천거되었으나 떨치곡 묘향산 서산대사를 찾아 사사하셨습니다.


선종 25년 임진년 여름 금강산에서 왜란을 만나 유점사와 영동 9군을 왜적의 참화로부터 구출하셨습니다. 

이어 서산대사의 격문을 받고 7백 여명의 승의병을 모집하여 

한편으로는 농사를 지으면서 군량과 무기증산에 힘쓰시고 선조 27년 4월 울산 서생포의 왜장 가등청정과의 회담에서 왜적의 남한 4도 활양등의 5개조의 요구사항을 여지없이 논박하셨습니다. 


두번째 회담을 마친 후 왜적을 토벌하는 방략을 상소하니 조정에서는 머리를 기르면 삼군의 통수권을 

맡기겠다고 제의하였으나 이를 사양하셨습니다. 

선조 29년에 경상좌우도축성의 총책을 맡아 악견, 이숭, 용기, 팔공, 금오, 달성, 주생, 부산성 등의 

성을 쌓으셨습니다. 

선조 30년 3월 남한산성을 쌓고 있던 중 가등청정의 요구로 네번째 만나서 

또 다시 남한 땅과 왕자를 오로 보낼 것을 요구하니 일언지하에 통박하고 돌아와서 

왜적의 재침을 경고하고 국방강화를 역설하는 상소를 올리셨습니다. 


이 해에 군량미 4천여석과 군기 1만여점을 비축해 바치니 가선대부에 오르셨습니다. 

12월에 울산 돗나성 공격에 참가하고 선조 31년에 순천전투에 참가하셨습니다. 


선조 37년(1604) 61세에 서산대사의 열반 소식을 듣고 가던 중 선조의 요청으로 강화사가 되어 

부산의 범어사와 초음 백양사에 머므르다가 일본으로 건너가셨습니다. 


일본의 국내 사정을 살피고 덕천가강과 담판하여 7년 왜란의 침략죄상을 엄중 추궁하고 

다시는 침범하지 않을 것을 조복받고 대사를 생불로 위하며, 조선국의 위신을 하늘같이 높였으며, 

양국 3백년 평화의 기틀을 잡아 놓고 많은 문화재와 동포 3천여명을 살려서 

1605년 6월에 부산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선조는 이 공로로 대사를 이순신, 권율과 함께 선무일등공신으로 봉하고 아울러, 영의정으로 명하니

거듭된 사양에도 불구하고 부득히 3일동안 영의정의 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선조 39년 63세에 왜란으로 타버린 궁궐의 재건을 완수하시고 선조 41년 선조의 승하 후 조문하다 병을 얻으시고

광해군의 서북방 수비의 요청도 응하지 못한채 해인사에서 요양하시다가 

광해군 2년 8월 26일 대중을 모아놓고 임종설법을 하신 후 열반에 드셨습니다. 

이때 세수가 67세이며, 승납이 51세셨습니다.




조선조에서는 해마다 사명스님의 추모제를 나라에서 봉행하였으며, 

부산에서는 부산진성내의 좌성대에 추모비각이 있던 것을 한일 합방이 되자 일본인들이 철거하여 버렸으며, 

이를 뜻있는 이들이 성남초등학교 교정에 모셨던 것을 다시 좌천동의 정공단에 모셔왔으며, 

사명스님을 추모하는 여러 스님들에 의해서

정공단에서 추모대재를 지내오다가 1982년에 부산시에서 시유지를 내고 여러 스님과 불자들이 동참하여

현재의 어린이대공원에 사명대사 동상을 모시고 부산진구사암연합회와 대한불교홍제종 사명사에서 주관하여

해마다 추모대재를 봉행하여 왔습니다.


1997년부터는 부산광역시불교연합회에서 주관하여 지방자치단체의 동참과 범불교계의 동참 속에서

추모대재를 봉행함으로써, 각종의 이기심으로 인한 갈등으로 국론이 분열되는 이 시대에, 

유교로 인하여 불교가 핍박을 받고 있던 조선시대에서도 일체의 차별심을 버리시고 

오직 민족과 나라를 구하고자 나서셨던 사명스님의 호국의지를 역사의 교훈으로 구현하고자 합니다.